♣ 여행/☞ 사찰여행

'김해 선지사' 법보신문 기사를 올리며

건강미인조폭 2014. 10. 14. 16:26
 http://blog.naver.com/dlpul1010/220105074646  관세음밥당님의글을 옮기며~


 
▲ 김해 선지사 주지 원천 스님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가야국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김해. 하늘을 맴돌던 학이 먹이라도 찾은 듯 힘차게 내려앉는 형상의 선학산(仙鶴山) 자락에 선지사(仙地寺)가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깊은 산 중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지만 사실 마을과는 1Km도 떨어져 있지 않다. 수행터로는 명당이다. 선지사엔 대웅전이 없고 대신 영산전이 들어서 있는데 기둥에 걸린 주련이 일품이다. 경전 한 구절 한자로 멋지게 써볼 법도 한데 아니다.

 

1970년 도인 되겠다며 삭발염의
전강·경봉·성철 스님 찾아 정진

해인사승가대·중앙승가대 졸업
선교 겸비하고자 내전에도 매진

은사스님 부름 받아 선지사 중창
불사회향 후 결제 때마다 선방행

유일에 함몰되면 상생은 불가능
예수 봉안은 이 시대 상생메시지
 
‘선지사 불심어린 천년고찰에/ 선학이 옛길따라 산을 품었고/ 나한은 인연따라 가야로 왔다/ 오백나한 기도성취 영험함에/ 부처님께선 복 받는다 하셨고/ 업장참회 발원은 성불의 시작’
 
  
▲ 사진 왼쪽부터 포대, 장유, 의상, 원효.

법당 문을 여는 순간 500아라한이 자아내는 장엄함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이 공간에서 만큼은 번뇌마저도 숨죽일 듯하다. 그런데 이내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옆에 앉은 아라한과 ‘내기’라도 한 판 하고 있는 듯 한 아라한, 약간 토라진 아라한 등 천차만별의 표정이 너무도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나란히 앉아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원효, 의상이 아라한 자리에 못 앉을 이유는 없다고 이 절의 주지 원천 스님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그 옆의 아라한은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 아닌가! 먼 산을 보고 있는 장유화상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장유사’가 자리한 불모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장유화상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에게 불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지고 있는 그 장유사다. 영산전의 장유화상과 불모산 장유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500아라한을 조성한 연유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순간 또 한 분의 아라한이 눈에 포착됐다. 수염에 긴 머리, 그리고 지팡이. 누굴까? 알아채는 시간은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예수’다. 거조암을 비롯한 많은 사찰이 아라한을 모시지만 예수를 봉안하지는 않는다.
 
  
▲ 500아라한 속 예수.

경전 일구를 차용하지 않고 주련 명구를 손수 지어 한글로 써 내려 간 것이나, 불모산에 마주 한 선지사에 오백나한상을 봉안하며 장유화상을 잊지 않은 의식이나, 한국사찰 최초로 500아라한 지위에 예수를 올려놓은 선지사 주지 원천 스님의 혜안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원천 스님은 어려서부터 목가적 풍경에 도취하며 ‘도인’이 되고 싶었다. 물론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도인, 공중부양하며 손 한 번 쥐었다 펴면 먹을 것도 나오게 하는 그런 도인을 꿈꿨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운명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던 나이.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염하자 ‘저렇게 세게 묶으면 많이 아플텐데!’라 되뇌었던 그 아이는 점점 죽음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1970년 범어사로 향했다. 산사에서 공양주 심부름을 하던 중 한 눈에 보아도 ‘도인’으로 보이는 어른에 마음이 꽂혔다. 조계종 전 종정 월하 스님의 상좌 운하 스님이었다. 어느 날, 죽 한 그릇 정성들여 끓여 운하 스님에게 드렸다. 거의 다 드실 즈음 부탁드렸다.
 
“운하 스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도인이 되고 싶었던 원천 스님은 수계 직후 1972년 해인사 하안거 결제부터 ‘시심마’를 잡고 좌복에 앉았다. 선지식을 찾아 정진한 원천 스님은 당대 내로라하는 전강, 경봉, 성철 스님을 직접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다. 내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9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1986년 중앙승가대을 졸업(4기)한 후 부산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관리도 공부했다. 나름 선교를 겸비하려했던 의지가 엿보인다.
 
1986년 은사 운하 스님의 부름이 있어 찾아뵈었다.
 
“덕천사를 맡아라!”
 
운하 스님이 선학산 절터를 매입한 건 1950년 3월. 터를 정비해 당우를 세우고 덕천사라 명했지만 사격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덕천사 법등이 원천 스님에게 이어진 셈인데 이때부터 불사인연이 닿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서울의 대원경 보살과 인연이 맺어졌다. 원천 스님의 정진력과 원력에 감복한 대원경 보살이 덕천사 불사 후원에 적극 나선 것이다. 대원경 보살이 작고하자 그의 고명 딸인 경명화 보살이 뒤를 이었다. 그 와중에 ‘덕천사’는 ‘선지사’로 사명이 바뀌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 경내에서 나온 유물을 고증한 결과 선지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9년 6월, 도량 터를 닦던 중 지하에서 ‘선지사(仙地寺)’가 확연하게 새겨진 기와 등 와당 30여점이 나왔다.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가 이 유물에 대한 학술고증에 나섰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막새무늬 등을 조사한 결과 선지사는 통일신라 때 건립되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 중엽까지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선학산 주변 일대의 지명은 옛날부터 ‘선지리’였다. 2001년 8월, 영산전 불사 회향과 함께 덕천사를 선지사로 개명했다. 원천 스님의 지중한 원력과 인연이 빚어 낸 ‘천년 가야고찰 선지사’는 결국 전통사찰 110호, 도문화재 330호로 지정됐다. 영산전 봉불식도 마쳤으니 ‘선지사 비약’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원천 스님은 2002년 1월 길을 떠났다. 안거에 들어 간 것이다. 이후 해제 때만 선지사에 주석하고는 결제가 다가오면 미련 없이 도량을 떠났다. 비워진 도량은 경명화 보살과 견공 ‘선정’이 지켰다. 그렇게 12년이 흘렀다. 지난 여름안거는 통도사 서운암에서 마쳤다. 왜 일까? 원천 스님은 빙그레 웃는다.
 
“영산전 불사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공부를 마쳤나? 아니다. 아직도 한참 멀었다.’ 공부 안 한 산승이 도량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판단했습니다.”
 
10년 원력을 세웠다. 20안거를 성만하기 전까지는 결코 결제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자신에게 걸었다. 사중 일로 어쩔 수 없이 내려온 적이 있어 10년 20안거 성만은 12년이 다 된 지난 하안거에서야 이뤄졌다. 10년의 긴 고독에서 무엇을 건져 올렸을까? 원천 스님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내 메모 하나 보라”며 선시 한 편을 써 보였다.
 
‘삼십오년 납선객(三十五年 納禪客)/ 남북동서 왔다갔다 했구나. (南北東西 往來頻)/ 그림자 없는 나무에 꽃 만발하니 (無影樹中 花發開)/ 주린 즉 밥 먹고 곤한 즉 잠잔다(飢卽食兮 困卽睡).’
 
성철 스님이 내려 준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잡은 후부터 지금까지 정진해 온 원천 스님의 살림살이다.
“두 어깨에 짊어졌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중에게 전할 법문 한 토막도 가끔 스쳐갑니다.”
 
‘짐은 내려놓고 법은 얻었다’는 뜻에서 ‘비움’과 ‘채움’의 절묘한 조화가 엿보인다. 종전엔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한적함을 얻은 듯해 보였다. 이젠 선지사 도량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예수’가 떠올랐다. “왜 예수인가?”를 묻는 질문에 원천 스님은 “상생·평화”라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선지사 와당 유물이 나오던 당시, 즉 김영삼 정권 때는 유독 많은 훼불사건이 발생했다. 사찰방화는 물론 부처님 머리가 잘려 나가기도 했다. 대부분 이웃종교의 광신도가 벌인 훼불행위였지만 교육, 체육, 법조계에서도 특정종교 편향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 경남 유형문화재 아미타불.

“부처님께서 전하신 ‘자비’와 예수님이 전한 ‘사랑’의 메시지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무엇부터 실천해야하는 지를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움직이는 열쇠는 ‘상생’입니다. 나와 당신, 나와 자연이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나옵니다.”
 
상생을 위한 첫 걸음을 불자인 우리가 먼저 내딛을 터이니 이웃종교인도 우리의 손을 잡고 평화를 향해 함께 걷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지혜도 발현해 보자는 원력이 담겼던 것이다. 다문화시대를 열어가는 우리 사회에 원천 스님의 상생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원천 스님은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놓고 ‘학살이나 다름없다’며 통탄했다.
 
“인명피해 규모도 엄청나지만 이스라엘의 공격방식을 보세요. 전차부대를 앞세워 이슬람사원, 일반주택, 자선단체, 학교, 병원, 자선단체 등은 물론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와 시설도 공격했습니다.”
 
가자지구 보건부(Gaza's health ministry)에 따르면 7월8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으로 16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중 20%가 18세 미만의 아이와 청소년들이었다. 부상자만도 9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의 이번 공격에 대해 유럽과 남미를 비롯한 전 세계의 주요 국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라 규정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단순히 땅을 차지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고 봅니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미래의 적’이라 한 이스라엘 정치인의 말을 허투루 들어선 안 됩니다.”
 
이스라엘 여성의원 아일렛 새이크는 페이스북에 ‘팔레스타인인은 모두 테러리스트이고, 그들을 낳고 기르는 부모는 테러리스트의 공급처와 다름없다’며 ‘모든 팔레스타인 엄마는 죽어야 한다’고 글을 올렸었다.
 
“이스라엘 특유의 선민의식이 작동한 겁니다. ‘하나님이 보장한 땅’을 갖기 위해 벌이는 일, 그게 학살이라 해도 정당하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말하는 ‘신’이 그들의 학살행위를 용납할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용납한다면 신이 아니라 ‘마(魔)’이지요. ‘유일’에 함몰되면 ‘상생’은 보이지 않습니다. 상생심을 내지 않으면 평화는 이룰 수 없습니다. ‘나’만 잘된다면 ‘상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극단적 사고가 부른 재앙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천 스님은 자리를 떠나는 필자에게 의미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세속 탐욕은 물론 종교 권위까지도 일찌감치 벗어 던진 사람들의 표정이 저 영산전에 표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그 미소를 만면에 뜨일 수 있습니다.”
 
  
▲ 선지사를 묵묵히 지켜온 ‘선정’.

선지사를 떠나기 전 영산전 주련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업장참회 발원은 성불의 시작’
 
성불은 말이나 의식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저 주련 속에 담겨있다. 상생평화도 마찬가지다. 원천 스님에게도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한다. 선지사 인근에 곧 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인데, 그에 걸맞는 유치원을 설립하고 싶단다. 이미 부지는 어느 정도 확보했다. ‘불교미래를 그려 갈 인재를 육성하고 싶다’는 원천 스님이니 그에 따른 인연도 곧 맺어질 것이다. 선지사는 이제 뒷산의 ‘선학(仙鶴)’과 함께 비약할 일만 남았다.

[작성자 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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