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힘이 든다.
그래도 우리 오빤데~~~
난 앉기만 하면 졸리다.
살이 빠진 오빠를 위해 바지 허리를 줄인다 했다.
오빤 안 줄여도 된다고 했다. 허리가 크니 바지가 흘러 내려 기장도 길었다. 난 노는 손에 바지 단이라도 줄이려 했지만, 오빠 자신은 그런 현상을 부정하는 듯했다.
며칠 전, 다녀간 올케가 가져온 총각김치 무를 오빠가 잘 드셨기에 낮에 영등포에서 올케가 온다기에 총각김치를 부탁했다.
그렇게 올케는 총각김치와 도넛을 사 들고 방문했다.
암과 투병 중인 오빠가 모르게 올케와 난 거실서 커피와 도넛을 먹었다.
오빠도 먹고 싶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모르게 먹었다. 미안해 오빠~~~
오후 김해 봉사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2년제 봉사회 회장마저도 개인 사정을 밝히고 1년만 한다고 단체 카톡에 올렸다.
‘인사드립니다
코로나로 총회를 차일피일 미루다 내외동에 확산으로 부득이하게 비대면으로 총무님이 올리는 자료로 총회를 대신합니다.
요즘 서울에서 홀로 사는 오빠가 암과 투병해오다 건강 악화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 간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코로나가 잠잠하면 내려가 대면으로 총회를 진행하려 했지만 2.5단계 비대면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저의 개인 사정에 의해 회장직은 이달로 내려놓고 차기 회장(ㅇㅇㅇ)에게 이임을 합니다
봉사원이 봉사를 해야 하나 회장직을 하는 동안 긴 코로나로 인해 회원들 간의 교류와 봉사를 함께 할 수 없어 많이 아쉬운 1년이었습니다.
회원님들의 높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차기 회장(ㅇㅇㅇ)은 적십자 봉사원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더욱 잘 이끌어주실 걸로 믿으며 여기서 작별을 고합니다. -이지연 배상- ’
이해하지 못한다는 전화가 걸려들었다.
그 전화를 받고 22년간 해오던 노란 봉사원 조끼를 벗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3시가 되어 잘게 썬 총각김치 무와 미역귀 삶아 다진 물에 찹쌀과 멥쌀 갈아 굴 죽을 드셨다. 그것도 아주 조금~~~
식사 후 통증의 몸부림을 가라앉히려 하신 듯, 식탁에 고개를 묻고 엎드려 한참을 있었다.
지난해부터 살고 있는 커다란 집을 이사 가려했었다. 또 남의 땅에서 하던 공장도 오빠 공장으로 매매하며 하필 이렇게 아픈데 두 개가 다 팔리고 구하게 되었다.
공장은 큰조카와 오빠가 두 달 전쯤에 구했고, 공장 가까운 곳으로 작은조카는 오빠 집을 구하고 있었다. 그 집을 이날 보러가야 했다. 올케도 함께 집을 나서며 조카가 구한 집도 보고 오빠가 구매한 공장도 보게 되었다.
이제 자기 이름 걸고 오빠 공장도 갖게 되었는데, 하필 병마와 싸우고 있어 맘이 너무 아팠다.
보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소리 없는 눈물만이 흘렀다.
올케도 조카도 가고 오빠와 돌아와 보니 큰조카가 종합야채 주스와 밥 대신 먹을 음료와 들여다 놓고 갔다.
낮에 올케가 사주고 간 도넛 중에 꽈배기도넛 반을 드렸다. ‘ 오빠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럼 큰조카가 사온 주스 드릴까?’ ’응 줘 봐‘ 주스를 마시고는 ‘이건 못 먹겠다.’ 했다.
그리곤 잠시 후 토할 것 같다며 안방 화장실로 향했다. 커다란 소리를 내었지만 다행히 헛구역질로 고생만 했다. ‘주스가 안 맞는 것 같다. 치워라’ 했다.
난 저녁으로 순두부탕을 다시 물에 순두부 넣고 건 표고버섯 잘게 썰어 파, 마늘 넣고 새우젓 다져 끓여서 준비했다.
한참을 쉬다, ‘저녁 먹자’ 했다. 하지만 속 아파했다. 난 등을 문질러 드렸고 오빠는 살살 두들겨 달라했다.
그리곤 밤 9시시 40분경 저녁을 드렸다. 맛있게 드셨다. 탕국을 더 달라했다. 아주 조금씩, 두 차례를 드셨다.
그렇게 통증과 싸우며 밤 10시가 넘어 맑은 순두부탕으로 대신했다.
그리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걸어보기도 하곤 안마의자에 앉아 안마를 받으며 잠시 잠이 들기도 했다.
11시, ‘잔다.’ 하며 안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잠자리에 들며 남편에게 오빠의 고통스런 모습에 눈물로 하소연하며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