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아침을 눈을 뜨며 식욕을 잃은 오빠가 어떤 걸 드실지 몰라 구찌봉을 살짝 익혀 당근을 넣어 갈았다.
아침8시 식탁에 앉는 오빠에게 주스를 내밀자, 물끄러미 눈싸움을 하시다, 마신다.
‘진작 이렇게 먹을 걸,’ 입에 맞는듯했다.
그리곤 암환자들의 음료 ‘뉴케어’를 마신다. 그리곤 얼굴을 식탁에 파묻는다. 한참 뒤에
‘내가 왜 그러지? 맥을 못 추겠구나, 병원도 가야하는데 세수도 못 하겠다’ 했다.
‘내가 물수건으로라도 닦아줄까’ 했지만 ‘냅 둬, 그냥가지 뭐’ 했다.
그리곤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린다.
난 큰 조카에게 전화를 했다. 평소 작은 조카가 모시고 병원을 가지만 큰조카가 함께 가주기 바라서이었다.
오빤 큰 조카가 집에 오자 호통을 치며 ‘공장에 할일이 많은데 오냐며 작은 놈하고 병원 다녀온다고 미루지 말고 일을 하라’고 명령식으로 말했다.
큰조카는 내게 입원에 대해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말기 암환자기에 항암치료도 안 되고 식욕촉진제 약을 복용하며 사는 동안 먹고 싶은 거 먹고 편안하게 살라는 거였다. 병원 역시 동네 가까운 요양병원을 알아보라며 주3회 영양제나 맞으라며 상담을 맞췄다.
상담을 마친 오빠는 생각이 많은 듯 병원 정문을 헷갈려했다. 그렇게 가정의학과를 다녀왔다.
돌아오며 오빠는 완제품부대찌개를 두 봉지 사주셨다. 김해 도착해 먹을 것도 없을 텐데,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사주셨다. 사실 전날 오빠가 먹고 싶어 샀지만 먹지 못했고 몇 번 사다가 맛있게 먹던 거라 했다.
저녁을 준비하며 그제 만들어 놓은 불고기에 낮에 사온 잡채를 섞었다. 그리고 다시 물에 무 넣고 낙지 국을 끓였다.
식욕이 떨어져 먹지 못하는 오빠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런 오빠에게 난 ‘오빠 전쟁준비 완료’ 한다.
그리곤 다 먹으며 ‘오빠가 이겼어’ 라며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오래만 살아주기를 바랄뿐이다.
저녁상을 치우고 저녁 9시 밤 운동을 하자고 했다. 감사하게도 기꺼이 응해주었다.
힘없는 다리를 휘청거려가며 안 가본 거리를 걸었다. 그곳은 만안교, 나를 처음 데리고 간곳이라며 오빠는 설명해주었다.
컴에는 요약해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가 현륭원 전배를 위해 가설한 다리. 홍교·석교. 시도유형문화재.’라고 쓰여 있었다.
밤길에 나선 길은 바닥이 콘크리트로 걷는 길로는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투병 중인 오빠에게 맞는 장소로 가까운 곳을 선택했기에 평소 다니던 운동 길이 아니었다.
35분을 걸었다. 난 오빠 뒤를 따르며 넘어질 듯 힘없이 걷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켰다. 저렇게 살려고 의지를 보이는데, 무엇이 문제기에 음식을 못 먹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남편은 오빠에게 최선을 다하라며 열흘 넘도록 혼자 생활하니 전화가 오면 오빠는 남편에게 늘 ‘나 때문에 자네가 홀아비생활을 하네, 미안하네.’ 했다.
미안하지만 주말 조카들에게 오빠를 부탁하고 김해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만삭의 큰며느리, 크루슨 병을 앓고 있으며 5살의 어린손녀가 있는 둘째 아들~
아들이라 한들 오빠는 그 애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신다. 말기 암환자이면서도 애들 걱정만 하는 아버지인 것이다.
밤 운동을 마친 후에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한 시간가량 바보상자를 보고 있던 오빠에게 요구르트에 아로니아/바나나를 갈아 드렸다. 감사하게도 맛있게 드셨다.
오빠는 내가 해주니 먹기 싫어도 그냥 퍼 드시는 거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내게 ‘너 없으면 어쩔 뻔했냐. 네 덕분에 잘 먹고 잘 견뎠다.’ 라고 오빠는 말했다.
그렇게 까만 밤을 하얗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