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서울을 가기 위해 새벽 6시 알람에 의해 눈을 떴다.
다음 달 15일이면 오빠의 1주기가 된다.
즉, 2021년 2월 말 고인이 된 친정 오빠의 손자 돌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을 가야 했다.
지난 일 년은 내가 견디기 힘든 한 해이었다.
그런데도 연이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며 지금껏 맘고생에서 헤매고 있기도 하다.
그런 중에 봉사단체장도 맡으며 그냥 형식으로만 걸치고 있는 셈이다.
무너지려는 맘을 부여잡고 버티며 일어나려 애쓰고 있다.
구포역에 도착해 ITX 새마을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내에서 일상을 쓰고 있다.
ktx 열차의 갑작스러운 결함으로 옮겨 탔기에 복잡할 거라는 예상은 나 혼자 생각이었고 기차 내는 한산했다.
어느덧 경산 역이란다.
허리 협착증으로 장시간 타는 건 무리기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했다.
조용히 캔커피에 의존하며 머리를 비워가고 있다.
지인과 아들은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해주었다. 그로 인해 안정을 취하기도 했다.
지난해 오빠의 간 병을 도왔지만, 결국 우리를 떠나셨고 떠나시기 한 달 전 태어난 큰손자를 안아 보지도 못하고 고인이 되셨다. 나는 친정집 큰 어른으로 그 손자의 돌잔치 참석차 오르는 길이다.
세종시에 사는 아들과는 오송역과 세종 중간인 대전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전역 12시 8분. 기차는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아들과 만날 수 있었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영등포 구청 부근에 사는 친정 동생 집으로 향했다.
아들과 서울 오르는 경부고속도로는 눈이라도 내릴 듯, 내 맘같이 잔뜩 찌푸린 날씨 속에 영등포 동생 가족과 만나 종로 행사장 북촌한옥마을로 향했다.
조카는 오빠 친구들은 초대하지 않았다 했다. 해서인지 조카의 친구들과 한옥의 특성의 비좁음으로 북새통이다.
예쁘고 건강하게 자란 손자 연재의 돌잡이는 부자 되라고 말한 부모의 희망대로 엽전의 돈뭉치를 들었다.
참석한 모두가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건강하게 자라라며 손뼉을 쳐주었다.
돌잔치 순서에 의해 행사는 이뤄졌고 한옥의 특성으로 6~8명이 한방에 앉아 식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자(母子)는 남동생 가족과 작은 조카 가족과 함께 한방에서 이날의 주인공을 맞으며 축하해주었다.
오빠 장손자의 돌잔치에 조카들과 손주들의 세배를 받으며 짧은 돌잔치를 마쳤고 서울 영등포태생의 나는 TV 속 그 삼청동을 처음 가보는 날이 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이 번화가가 아니었을 때 가본 적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변화가 심했다.
나의 친정도 결혼 전까지는 한옥이었기에 분위기는 조금 안다.
그곳의 한옥은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고 도시 속의 조선 시대 분위기를 보여주는 안정감마저 들었다. 지금은 전통문화체험관이나 한옥음식점 등으로 활용되어 있다고 한다.
온라인을 통해 돌잔치를 잡게 되었다고 했지만, 조카도 실망한듯했으며 행사를 치르기에는 아닌 거로 추천을 피하고 싶다. 그냥 외관상 한옥만 보기만 좋은 거로~~~
영등포에서 남동생 가족과 헤어지고 아들과 밤길을 운전하며 안성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하곤 사랑스러운 며느리와 손자가 있는 세종시에 도착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손자 옹알이의 재롱에 시간 가는지 모르고 자정이 넘어 새로 1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며느리는 모유량을 줄이고 분유를 먹이려는 손자는 모유를 떼지 못해, 밤새 모유를 달라며 울어댔고 겨우 90일, 모유 떼는 시기가 이른 듯하지만, 며느리의 생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손자가 잠자기를 기다렸지만, 한 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우며 1월 16일을 맞았다.
1월 16일
아들 내외를 편안한 잠을 자게 하러 나와 자던 손자는 깊은 잠을 못 자고 밤새 모유 달라고 4번이나 깨었지만, 분유를 먹이려고 애썼다.
손자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옹알이 통역은 어려웠다. 단지, 손자 옹알이가 내게는 ‘할머니 모유 먹고 싶어요.’라고 들리는듯했다.
아/점으로 아들 며느리가 끓여주는 떡 만둣국을 먹고 좀 더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들 차로 대전역까지 배웅을 받았다.
언제나처럼 아들의 대전역 유명세 빵을 선물 받으며 기차에 올랐고 손자 사진을 보며 한 시간 40여 분을 보냈다.
구포역에 배웅나온 남편에 의해 김해에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