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1444

부모님 산소에 기쁨 알리며

3월 13일봄을 맞아 우리 집에는 작고 큰 기쁨이 있었지만, 친정 우환으로 내 자식들의 기쁨조차도 내색하지 못했다. 남편 쉬는 날, 안동 시부모님 산소를 찾아 감사의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지만, 그게 우선이었다. 안동 떡 방앗간에서 떡을 찾아 산소에 도착했다. 잔디는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먼저 제단에 아들의 승진 소식이 담긴 이메일 복사용지를 올려 승진 소식과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알려드렸다.가족의 행사 중에 가장 기뻐할 두 가지를 가장 먼저 조상님께 알리는 남편의 의식이었지만, 이번은 조금 늦게 부모님께 알리게 된 것이다. 이날은 풍산장터는 찾지 않고 내려오는 고속도로 군위휴게소에서 가락국수로 배 둘레를 채우고 일지 돌아와 보약 같은 잠을 청했다.

허리통증 부산병원으로

3월 8일 남편과 나의 허리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온갖 봄꽃들이 행렬을 이뤘다. 오빠 병간호로 겨울을 통째로 삼킨 계절은 어디 가고 김해는 봄 세상이었다. 언젠가 TV를 통해 척추질환의 김도근 선생의 방송을 보고 이곳 부산 해운대의 부민병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곳에서 김도근 센터장의 진료를 받고 시술이나 수술은 안 해도 되며 척추 주사 처방으로 허리에 주사를 맞고 2주 뒤에 다시 진료를 받기로 하고 약을 처방받아 돌아왔다. 3, 4, 5번의 디스크가 있고 허리변형으로 약간의 고통이 따르는 것 같다, 꼬리뼈에 물혹이 있다. 시원한 답을 듣고 돌아오며 기분으로는 벌써 나은 듯했다. 하지만 무거운 것도 손에 무엇을 드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열심히 약을 먹어볼 것이다. 친정 오..

석 달 만에 귀가

3월 6일 영등포 동생 집에서 조카딸 신행 음식을 준비하는 올케를 돕고 있었다. 김해에서 서울에 출장 온 차량이 월요일까지 교육을 받는다며 화요일 내려갈 수 있도록 연락을 받았었다. 난 편히 내려갈 수 있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화가 오더니 교육 일정이 짧아졌다며 오늘 내려갈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올케에게 간다고 하고는 급히 군포로 향해 옷 보따리를 챙기고 텅 빈 오빠 집을 뒤로하고 석 달 만에 김해에 내려오게 되었다. 먼저 가신 오빠의 빈자리가 서운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난 우울했다. 그러면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이 온다면 남편에게 더없이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니 집안은 청소를 안 해 엉망이고 화초들이 모두 시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옷가지 정리하며

3월 5일 오빠의 옷과 주방용품 가구 등을 재활용센터에 보내려 정리하며 눈물을 흘렸다. 언니가 쓰던 물건마저도 오빠가 혼자 살며 알뜰하게 쓰고 이제 주인 잃은 물품들의 옛 추억이 되살아나며 난 하염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장롱도 비워가고 주방 찬장도 비워져 가며 재활용센터에서는 오전 10시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거실 커다란 티브이에서는 이런 내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사를 들려주고 있었다. 오빠를 마음속에서 훌훌 털고 보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쉽지 않았다. 오빠!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온 세상 후회 없이 너무도 열심히 잘 살아오셨어요. 지금은 편안하게 쉴 때입니다. 든든한 두 아들 잘 키워 주셨고요 우리 남매의 오빠고 형이어서 고마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빠가 이루신 모든 것 저세상 하늘나라에서 ..

삼우제

3월 3일 어제 하루, 동생 집에서 머물며 삼우제를 지내려 마지막 오빠가 입었던 옷가지를 싸 들고 납골당이 있는 괴산으로 향했다. 조카들은 각각 군포와 의정부에서 오기에 잠시 후에 도착하였다. 납골당에는 발인이 있던 날 비로 그대로 천막이 처 있었다. 날씨는 좋았다. 먼 발취에서 부모님께 우리가 다시 왔음을 목례로 인사들이고 삼우제를 지냈다. 큰 조카는 손자를 안아보지 못한 한을 잊게 하려는 듯, 손자 연제를 오빠께 다시 한번 보여드렸다. 난 오빠에게 물었다. '부모님을 만나 보았냐고 올케를 만나 보았냐고, 이제 아프지 말고 평안하라고,~~~' 제를 마치고 큰집 마당에서 옷가지를 태워드렸다. 괴산의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며 점심을 함께하고 오빠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조카는 집에 돌아온 후 머뭇거림을..

오빠를 보내며

3월 1일 고인이 된 이영규 오빠의 발인, 새벽부터 하늘도 아주 많이 슬피 울었다. 비로 노제를 안에서 지내고 오빠를 모시고 가시는 마지막 길에 이전을 앞둔 새 공장을 들러 진행 과정을 보여드리고는 화장터 ‘수원시 연화장’으로 향했다. 한 줌의 재로 변한 오빠를 언니 곁으로 보내드리며 눈물을 삼키려 애를 썼다. 동생 부부와 우리 부부는 납골당에 먼저 도착해 먼저 부모님께 산소를 찾아 오빠가 부모님 곁으로 간 것을 신고했다. 친정 집안 조카님과 사촌 동생 도움으로 납골당에 오빠를 잘 모실 수 있었다. 오빠가 가는 길에 하늘의 슬픔은 그칠 줄을 몰랐다. 괴산 연안이씨 납골당 멀리 있는 길에 새벽부터 오빠 친구들도 13~15명이 함께 내려와 주셨다. 그분들을 모시고 주변의 식당으로 이동해 음식 대접하고 각각의..

암에게 지다

2월 27일 넓은 1인실 병실은 오빠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새벽 2시경 두 번째 묽은 혈변을 보시고 혈압은 점차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04시58분 간호사는 '운명하셨습니다.' 마지막 묽은 혈변을 보시며 우리 곁을 떠나 아주 멀리 떠나셨다. 당직의사가 올라와 사망선언을 하고 장례사를 부르며 집안에 연락을 취했다. 지난해 11월을 지나 추운 겨울을 지나 2021년 매화가 핀 새봄은 왔지만 오빤 암에게 지고 말았다. ‘오빠~’ 내게 많은 추억만을 남겨주고................. 소리 내어 불러도, 짜증 섞인 목소리도 그림자조차도 이젠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오빠의 명복을 빌어도 보며.............

’상승 제는 안 쓰실 거죠‘

2월 26일 허리통증으로 오빠를 더 이상 들 수가 없었다. 휴게실에 잠을 잔 난 새벽 4시 눈이 뜨였다. 병실을 찾으니 오빠 옆에서 조카는 폰 게임을 하며 날밤을 세운 듯했다. 두 시경 조카는 머리부터 땀범벅인 아버지를 닦아 드렸다 했다. 그래 설까 오빤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잘 했다. 고생했구나.' 오빠 얼굴도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젯밤 내 손을 잡은 건 닦아 달라는 손짓인 듯 했다. 허리가 아파 낼 아침에 닦아 줄게 했는데, 밤에 닦아 달라 내 손을 잡은 듯 했다. ‘오빠~ 몰랐어. 미안해’ '고모 더 주무세요.' 난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블로그 일기를 쓰며 날 밝기를 기다렸다. 새벽6시 잠이 오기 시작했다. 따끈한 국물 생각에 편의점을 찾았다. 조카에겐 삼각 김밥을 건네고 난 컵 떡국..

‘임종이 다가오네요.’

2월 25일 휴게실 소파에서 지난밤을 보냈다. 그제 오빠 집에서의 두려움으로 하얗게 지세웠지만 소파의 불편한 잠자리는 공포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함께 입원한 환자에 의해 병실 문은 열려 있어, 오빠 상태를 볼 수 있었다. 작은조카도 잠을 설친 듯 폰을 만지며 간이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병실 밖에서 지켜만 보고 다시 휴게실로 돌아와 블로그 일기를 써내려가며 아침을 기다렸다. 병실, 찡그린 오빠의 모습은 악몽과 싸우는 표정으로 읽어본다. 옆에서 오빠와 이야기로 재잘거리면 '애만 오면 시끄러워'했던 오빠의 목소리라도 이젠 듣고 싶어진다. 새벽 6시가 되자, 작은조카 딸내미가 복통으로 응급실을 찾았단다. 조카가 내려가고 손녀를 보고 싶은 맘에 내려갔지만 너무 울어 약 처방만 해서 돌려보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