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1444

된장찌개와 보리밥

8월 31일 날은 제법 더웠다. 남편은 며칠 전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병원은 코로나로 문병을 할 수가 없어 병원 밖에서 잠시 만나 커피를 마시며 안부를 묻곤 했었다. 4일 만에 집에 돌아온다는 소식에 집 청소를 하며 남편을 맞았다. 점심 무렵 돌아온 남편은 집에 돌아오자 보리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주변 단골 보리밥집을 찾았다. 식성이 변한 건지~ 그 집 음식이 짜진 건지~ 삼계탕으로 보신을 해주고 싶었지만, 뙤약볕의 무더위에 짭짤하게 한 끼를 했다. 남편은 갖은 채소와 보리밥을 좋아한다. 식성이 나와 다르지만, 우리 집에 주방장인 난 남편의 식성을 맞춰주려 노력 중이다.

가늘 하늘의 변덕

8월 12일 햇빛을 뇌리 쬐던 이른 아침 날씨는 10시가 넘어가자, 물 폭탄을 내렸다. 베란다 창문을 닫으려다 보니, 옆 라인 이사 가는 차량이 그대로 물세례를 받아가며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비로 가는 길은 험해도 그 댁이 부자 되기를 빌어도 본다. 오후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매미 떼들의 떼-창으로 울어댔다. 어딘가에는 수해를 입히는 장마로~ 매미 떼들의 합창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더 안 좋다. 묻지 마라

8월 3일 이번은 안과와 치과를 가야기에 오빠 집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개발하는 것이 있어 오빠는 그저 바쁘기만 했다. ‘오빠 몸은 어때?’ 하면 ‘더 안 좋다. 묻지 마라.’ 하면서도 공장으로 돌아와서는 컴퓨터로~ 어제, 전철 역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오빠의 모습에 먼저 저세상으로 간 올케언니 생각이 간절했다. 오빤 ‘난 올케와 살면서 싸워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올케를 세계 일주를 해준 건 후회 없이 잘했던 것 같다.’ 하면서 간혹 회상하곤 한다. 언닌 조용한 성격에 지혜로운 여자였다. 해서 난 언니를 오빠보다 더 의지하기도 했었다. 그런 모습에 오빤 ‘어이, 동생 언니가 아니고 나하고 한배에서 나왔다.’ 하며 시샘 아닌 시샘을 하기도 했었다. 난 안과(백내장 치료)와 치과(임플란트)를 다녀와 전..

오빠 집

8월 1일 어제 서울 왔음을 알리자 오빠는 오빠 집 다녀가기를 바랐다. 올케는 오리고기찜을 장만해 오빠께 전달토록 했다. 늘 남편에게 잘해라 했던 오빠기에 내가 필요한 일이 있겠거니 하고 기차표도 반환하고 오빠 집으로 향했다. 오빤 ‘건강이 더 안 좋다.’ 하면서도 공장에서 개발하는 제품이 있어 그걸 마치고 싶은 생각에 에어컨 교체로 날 찾은 것이다. 멀리 김해 살면서 늘 안타까워하던 오빤데 그냥 부를 리가 없다, 생각했었다. 쓰던 에어컨은 고장으로 교체 중에 물 빠진 곳에 물이 차 있어서 집에 물난리가 나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었다. 에어컨 기사와 바닥을 청소하고 밀린 빨래를 세탁하고 건조기에 넣어 돌이며 오빠를 기다렸다. 청소까지 마치곤 오빤 집에 들어왔다. 두 눈은 오빠의..

물 폭탄 맞으며 구포역행

7월 30일 장마다. 장마는 전국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는 뜻 데로다. 김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 9시 30분, 맑은 하늘을 보며 백내장 수술로 미장원에서 머리 감고, 머리에 힘고 주고 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서려 할 때 먹구름이 쫙~~ 에고~~~ 불길한 예감을 그냥 지나지 않았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남의 눈 의식 않고 장화까지 갖춰 신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최근 유행어가 된 물 폭탄~ 물 폭탄을 맞아가며 김해 내동에서 127번 버스를 기다렸다. 처마 밑에 있어도 지나는 차량으로부터 물세례를 받고 비는 우산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그렇게 127번 버스를 기다리며 오는 비 뿌린 비를 모두 맞고서야 127번 버스에 탑승했다. 장화에도 물이 가득 흥건하게 차버렸다. ..

오빠 집 3일째

7월 21~22일 출근준비를 하던 오빠는 마음 같지 않다면 심호흡을 길게 하곤 더디게 움직였다. 공장에 들러 수안보를 다녀온다 했다. 난 그동안 영등포로 향했다. 길잃은 아지매가 되지 않으려 정신 챙기며 어렵게 영등포 동생 집을 찾았다. 버스 손잡이는 예쁘게 매달려있었으며 37년 전 떠난 이곳의 전철은 어지러울 정도로 변했다. 올케의 따듯한 환영을 받으며 잠시 수다로 이어졌다. 백내장, 하지정맥, 허리협착증, 팔목인대 통증~ 한 군데도 멀쩡한 곳 없이 내게 찾아와 남편과 아들 내외 보기 민망하다 속내를 드러냈다. 올케는 '그만큼 형님이 아들에게 집중하며 긴장하고 사셔서 그래요. 좀 쉬세요' 하며 위로했다. 말이라도 듣기 좋게 해주니 올케가 고마울뿐이다. 과연 그럴까~? 이런 상태로 오빠 간호가 가능할까?..

오빠 집에 올라

7월 18~20일 7월 18일 오빠 집에 가려고 기차에 올랐다. 기찻길 가에 벼가 익어가는 초록이 아름다웠다. 집에서 준비한 토스트를 준비해 몇 장의 책장을 넘기며 오빠 집에 도착했다. 출장 중인 아들 내외도 오빠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잠시 후, 아들 내외의 방문도 받았다. 투병 중인 외삼촌께 안부 인사차 들렸다 했다. 오빤 건강을 위해 수안보에 황토집을 지으려 다녀오며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나눠줄 양의 옥수수를 구매해 왔다. 내겐 생으로 먹는 옥수수 두 상자를 보냈다 했다. 생으로 먹는 옥수수도 맛을 보여주셨다. 아삭하니 신기한 맛으로 식감이 좋았다. 활달한 성격의 며느리 인사를 받으며 오빤 반가운 미소로 화답하며 아들 내외에게도 옥수수 한 자루를 주었다. 두 대의 김치냉장고를 정리하며 묵은지가 여러..

송도, 안남공원 드라이브

7월 11일 어제, 1박 2일의 적십자 교육을 마치고 내 몸은 장마철이라는 불리함에 허리통증이 따라다녔다. 남편 쉬는 날, 이른 아침 산에 오른 남편은 10시경 귀가했다. 난 해물 정식을 먹고 싶어 남편에게 말했다. 그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 남편에게 잘 가던 낚시터 부근이라고 말해 남편은 관심을 보였다. 몸은 피곤해도 남편이 드라이브 가자는 말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남편의 핸들은 부산 송도로 향했다. 어디 가요? 물으니~ 2년 전, 남편 고향 친구들과 먹던 물회가 갑자기 먹고 싶다며 물회 집으로 안내했다. 이게 아닌데 ‘해물 먹고 싶다,’ 했는데~ ‘내 말은 귀퉁이로도 듣지 않았네’ 하며~ 서운함을 전했다. 이른 점심시간, 물회가 우리 앞에 도착하자 거제 물회 집을 떠올리며 ‘어디가 맛있나 보자’..

남해 마늘

7월 6일 햇수로 헤아릴 수는 없지만 몇 년째 귀가하면 나보다 먼저 도착해 현관 앞을 지키는 마늘이 있다. 더위에 쉽지 않은 마늘 농사는 동생 부부가 먹을 만큼의 짓는 마늘 농사가 어김없이 올해도 도착 되었다. 동생 부부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얼굴을 뵌 적이 없는 부모님의 마늘을 앉아서 얻어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지금은 밭 정리하고 소일삼아 짓는 약간의 밭이 있다고 들었다. 그럼 에도 동생 부부는 여전히 김해에 마늘을 보내오고 있다. 친동생은 아니지만, 봉사활동 하며 맺은 인연으로 부부가 서로 왕래를 하곤 있지만, 남해 마늘을 받으면 우리 부부는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든다. 그들 부부에게 감사의 전화를 하면 서로 모른 척하며 아내가 보낸 나, 남편이 보낸 나, 하기도 한다. 올해도..

오빠 집을 다녀오며

6월 26일 오빠 집에 가기 위해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구포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이용객들이 적었으며 기차 내는 조용했다. 승차권도 한 칸씩 띄어 앉도록 발행했다. 평일인 이유도 있겠지만 이리만 되면 좋겠다 싶을 만큼 거리 두기는 안정적이었다. 낙동강 줄기도 출렁임 없이 잔잔했다. 배웅해준 남편의 전화벨이 울렸다. 37년 살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전화를 안 하는 사람이 ‘잘 탔냐’고 전화를 했다. 변하고 있다. 남편도 나이를 먹는 것 같다. KTX가 이용객들이 작아 운행을 중지한 탓에 새마을로 하염없이 가야 했다. 하지만 내부는 가벼운 잠바를 걸치고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아니 추웠다. 가벼운 겉옷을 챙기는 것은 기차 여행자들이 참고할 부분이다. 대구부터는 옆자리도 메꿔졌다. 구미..